Hope for Forgiveness

강의자료-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 2015년

    (Washingto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Inc)--------2015년 2월 21일

발기 동기
1992년 11월 24일 워싱톤 한인교회(담임 조영진목사) 여선교회(회장 강순임 외 박정순, 이정숙 님) 주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황금주 할머니를 모시고 <기도와 증언의 모임>을 가졌는데 처음 듣는 천인공노할 인권유린 사례에 큰 충격을 받은 뜻 있는 이들이 적극 나서게 되었으며 점차 범 사회적, 범 동포적인 사안으로 부각됨에 따라 동년 12월에<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이하 본회라 칭한다)가 발족하게 되었다.

목적
일본 군국주의의 조직적인 전쟁범죄의 희생양이되어 소중한 삶을 송두리째 유린 당하고 처참한 인생을 살아온 역사적 비극의 희생양, 갈기갈기 찢기어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했는가, 질시와 냉대와 외면으로 우리는 한 번 더 그들을 죽이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가?.

늦게나마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자각을 토대로 본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국제사회에 인지시키고 아울러 인권과 평화를 존중하는 세계만방에 알림으로 희생자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은 물론 일본정부의 진솔한 사과를 받아내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로 본회를 창립한다.
회장; 이동우
상임위원; 강순임(후에 부회장), 이문형(후에 부회장), 이종연(법률고문), 고 양승길(감사) 등 30여 위원 이사

동 위원회는
1993년
*
2월과 7월에 위안부문제 공개토론회, Symposium을 열고 동포사회 연대 의식 고취는 물론 국제적 여론조성에 주력.
* 3월 3.1절을 기해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와 정의>를 위한 가두행진 주관.

본 회 자체의 역사를 진행함에 앞서 일본군 위안부가 태동하였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국제정세 및 역사적 흐름을 통하여 일인들의 야욕이 어디까지였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04년 - 한.일 의정서 조인

1907년 -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부임.

  • 한국군 해산

1908년 – 동양척식회사 설립.

  • 조선 전역에 일본인 작부 2,914명(통감부 통계연감)
  • 이후 해마다 숫자가 늘어나며 공창제도로 발전.

1910년 8월 22일 – 한일합방.
1918년 – 일본 시베리아 출병—7개 사단 중 1활이 성병 감염
1923년 – 관동대 지진 후 조선인 학살사건 발생.
1925년 – 치안유지법 공포.(데라우치 총독)---유곽 발전정책 폄. 아편이 공공연하게 유행처럼 번지고 매독이 확산됨.
1930년 –조선민족 반도 밖으로 이전 시키며 분산조치. 만주로의 대규모 이민정책.
1931년 – 만철 폭파사건으로 관동군 전투 개시. 만주지역이 인육시장화.
         일본 국내 경제공항으로 매춘업자들 만주로 진출.
         조선 농촌지역에 여공모집(위안부 모집을 위장한 것) 광고가 나붙다.

1932년 1월 – 상해사변.
       3월 – 만주국 건설 선언

  •    관동군 기병 25연대에 조선인 위안부 25명 배치.
  •    조남읍에 위안부 30명(조선인 20명 확인)

1935년 3월 – 공창제도 폐지.
1936년 1월 – 조선 내 1개 면에 신사 1개 건렵령, 참배 강요.
1937년 9월 – 국민정신 총동원령.
1937년 12월(13~20) 남경 대학살. 34만명이 학살, 2만명 강간.
1938년 1월 8일 – 상해 군 부대 근처에 국군 오락소 건설
육군 위안소 제 1호 탄생
           12일 – 관리동에 육군 오락소 규칙이 나붙음
큐슈에서도 약 20명의 위안부가 도착.

       2월 – 각 주둔지로 위안소가 확산됨.(상해, 항주, 상주, 남경 등)
             이 시기부터 업자들은 군대를 배경으로 위안부 모집하기 시작.
       3월 – 상해에서 항주 철도 이동하며 병사를 위안.
       4월 – 국가 총동원법 공포.
       7월 – 국민정신 총동원령 조선연맹 창립.
       8월 – 조선인 군 위안부 300여 명 사할린에.
           (당시 사할린 거주 장재술의 진술-진주, 사천, 울산 등지에서 나고야 방직공장
           직공모집이라고 속아서 온 16~18세의 조선여성들)
       10월 23일– 일본군 광동 점령
            25일 – 중산대학 근처의 민가를 접수-위안소로 개설함.
                    당시 중국 전선에 약 3만~4만 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음.

1939년 1월 – 창씨개명 실시.
1941년 6월 28일 – 조선총독부 총무국에 2만 명의 위안부 소집 책임의뢰-
      8월 초순 – 조선인 위안부 1만 5천 명이 모집됨.
      9월 – 제남경비지구 위안소에서 자상사건 발생-성행위 중이던 동료를 빨리 끝내지 않는다고 단검으로 허리를 찌르는 사건.

1942년 1월 – 일본군 마닐라 무혈입성, 부녀자 강간 자행.
              요코하마로부터 위안부 100명 급파 됨. 마닐라의 모든 호텔을 위안소로 바꿈.
   1월 22일 – 라바울 섬 진입.
   1월 23일 – 라바울 시장의 딸을 대대장을 시작으로 차레대로 윤간.
              남방전선 조립식 간이 위안소 설치.
              여자애국봉사대라는 이름으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90명을 상대하였음(1일 기록)
 5월 22일 – 민다다오 섬에 위안소 개설.
 5월 8월 – 최 남방기지 미군에게 패배 미군의 보급 차단으로 위안부들 포함 2만여 명 아사.
   12월 – 동경에서 나고야를 거쳐 마리아나로 항해 하면서 수비대가 배치된 곳마다   위안부 20명씩 배속. ( 120명)

1943년– 학도병 1기 모집.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더욱 조직적인 모집. 비전투요원 귀환명령에도 라바울의 위안부 행렬 계속됨.
        공습 중에도 위안행위 계속 강요.

1944년 – 서울 방산국민학교 6학년 4반 이께다 담임 정신대 모집.
       2월 27일 – 필리핀 남쪽 트럭섬의 동굴에 대피한 위안부들 기관총 난사 학살(6구~70구 확인).
    버마 랭군의 70명 조선 위안부가 군대에게서 버려진채 시탄강을 건너던 중 익사.
   북 버마 미토키나의 60명 위안부도 버려진 후 뗏목을 타고 이자와지 강을 건너다가 탁류에 휩쓸려 감.
   10월 – 루손섬 81여단과 82여단도 위안부 버리고 철수.

1945년 1월 – 마닐라 지구에서 위안부 200명 잔류, 목격.
       5월 – 버마 위안부 500명 중 100명 행방불명.
      8월 10일 – 뽀로나이스크 조선인 위안부 20명 기차에서 참살 당함.(생존자 4~5명)
      8월 15일 – 종전, 조선총독부 뒷뜰에서 자료 소각.
       수나트라 메당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퇴각하는 일본군 200명에게 위안부 수 명 윤간 당함.
종전 후 – 일본군에 속해있던 한국인들은 연합국의 전범재판으로 23명이 사형 당함.
          무장해제가 되고 공무원 정직령이 내리고 일본은 전범자 처벌을 위한 국제전범사법재판을 진행하면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단 한 명의 처벌도 없이 원상대로 돌아갔으며 오늘까지도 전쟁범죄 핵심 책임자나 최고 책임자인 천왕의 전범처리는 미재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1952년 4월 28일 –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정. 필리핀, 월남, 버마, 인도네시아까지도 서명국에 속해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가 인정 되었는데 한국은 미국의 잘못된 견해로 서명국에서 빠짐.

1962년 11월 12일 – 김종필, 오히라(단시 일본수상)의 한일문제 정치적 합의로 일괄 타결.

1965년 6월 22일 – 한 일 기본조약 체결—태평양전쟁 희생자에 대한 피해상황이나 문제점 흔 적도 없음.
조약은 무상:3억불(이중 5%는 확인된 전쟁사망자 유족에게 지급, 나머지는 기계류 구입)
유상: 2억불(연 3.5% 이자로 7년 거치 20년 상환—전액 갚았음) 일본에서는 경제협력금이라고 표현됨.

1965년 12월 – 일본 국내특별법 제정. “…이로써 한국정부(국민 포함)의 일본에 대한 대일재산 및 청구권을 소멸한다.”는 일방적 후속 처리법을 정하고 현재에도 이 법을 내세우고 있음.
1988년 8월 2일 – 한국교회여성연합회원들 위안부 발자취를 따라 일본 후꾸오까에서 오끼나와까지 답사.
1990년 11월 –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발족.
1992년 8월 9~23일 –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정신대문제 증언, 이후 W.C.C 제안으로 의제로 채택됨.
       11월 11일 – 캐나다 기독교여성회 초청으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황금주 할머니 증언차 북미주 방문.
       11월 23일 – 뉴욕에서 미 동부지역 동포들 주최로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유엔건물 앞에서 궐기대회.
       11월 24일 – 워싱톤한인교회에서 황금주 할머니 증언.
       12월 11일 – 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 해결촉구를 위한 1만명 서명운동(일본, 한국, 미국정부와 유엔, W.C.C. 등에 제출키 위함)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일본군들이 주둔하면서 우선하여 설치하는 것이 위안소였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조선의 소녀들이 끌려왔다.
통계에 의하면 18만 명의 위안부들이 동원됐고 80%가 조선인이었다 하니 12만 명이 되는 것이다.
자료들을 불태우고 꽁꽁 감추어졌던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들이 주위의 찌프리는 눈살을 전 몸으로 받으며 하나 둘 증언에 나서면서 백일하에 들어나게 되었고 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가 태동이 된 것이다.
이후 본 위원회의 발걸음은 쉴 틈도 없이 바빠졌다.일면 1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서두에 이미 밝힌바 있는

1993년
* 2월과 7월에 위안부문제 공개토론회, Symposium을 열고 동포사회 연대의식 고취는 물론 국제적 여론조성에 주력.
* 3월 3.1절을 기해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와 정의를 위한 가두행진 주관.

그리고
1993년 4월 – 일본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보상촉구 서명운동의 결산 8000여명의 탄원서 주미 일본대사관에 전달.
4월 - Tokyo Asian Symposium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이동우회장, 함두찬 이사 참석(일본 지도급 여성 10여명(도이 다까꼬, 미끼 무쓰꼬, 여성 참의원 등)주관 일본 전국 여성 단체들 참석한 대국제 심포지움이었음.
기조 연설:  일본 사회당  도이 다까꼬 당수의 기조 연설후, WCCW 의 이동우 회장 두 손을 꼭 붓잡고 "미국 정부를 움직여 일본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정책에 앞장 서 주시오."

6월 13일 – ‘Lafayette Park’ Washington D.C.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한국인대회”를 거행, 조영진 목사님의 성명서, 이문형 상임위원의 결의문 선창과 채택에 이어 가두시위를 하였음, 시위에는 중국계, 필리핀계 다수가 참석하여 400여 명이 참가했다.

8월 30일 – 일본의 무라야마 수상 “정신대 피해자들에게 개인배상을 할 수 없다”는 <민간기금안>에 대한 담화 발표.
9월 – 새로 취임한 일본의 호소가와 수상 앞으로 위안부문제 해결 촉구안을 주미 일 대사관에 전달하고 10월 1일자 워싱턴포스트에 그내용과 이미 전달된 사항을 공표하는 유로광고를 함으로써 본 문제를 위한 본 위원회의 입장을 밝혔음.

1994년
11월 – 국제 법사위원회(The Int’l Commision of Gurists)는 특별보고서에서 “이 종군위안부들이 거짓과 강요에 의해서 일본군에 강간, 유린 당한 것은 틀림이 없다” 결론. 
11월22일 – 국제 법률가협회(I.C.J.)는 “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긴급조치로 피해자 개인의 재활을 위하여 즉시 $40,000씩을 지불하고 차후에 더 추가해야 한다.”고 공식발표
             ***  본 대책위원회는 일본의 UN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반대 서명운동을 범 아시아 운동으로 전개.

1995 8/9월
- 중국 북경개최, '제 4차 세계 여성 대회'.에 이동우 회장 / 김광자 재무이사 / 함두찬 이사 참석 같은 해 4/5월 미 감리교 회관에서 개최되었던 정신대문제 사진 전시품을 지참, 북경에서 "정신대 문제 비데오 및 전시회" 개최, 온 국제 여셩들을 대상으로 열린 최초의 국제 전시회였음
1995년 9월 – UN의 여성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서에서 Ms Radhika Coomaraswamy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범죄문제를 UN인권위원회에 상세히 보고.
1996년 9월 – 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워싱턴의 죠지타운대학에서 국제심포지움.
             죠지타운대학과 코리아 소사이티와 본 정대위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 행사 에는 학자, 역사가, 문필가, 학생들이 두루 참여.
             또 3일에는 위 심포지움을 위해 방미 중인 김윤심 희생자외 본회 위원들과 미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실의 대표들과 회담.

1996년 12월 3일 – 미 법무성은 ‘일본군 위안부’와 ‘731부대’의 관련자들 중 16명에 대한 <요 감시인> 명단에 올리고 미국 입국을 금지한다고 발표.
(1979년에 제정된 ‘Holtzman수정안’이 발효된 이후 독일의 나치범들에미 입국거부령이 내려진 일이 있으나 비 구라파계로서는 처음이라며 미 법무부 범죄특별수사국 Eli Rosenbaum 국장은 “오늘 미국정부가 이와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위안부 희생자들과 731 세균부대 희생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앞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죄 악의 반복을 방지하려는데 그 뜻이 있다고 설명.

1997년 7월
– William Lipinski를 선두로 미 국회의원들(98년 3월 11일 한 53명)은 연대 서명으로 일본정부는 2차세계대전 당시에 저지른 전쟁범죄의 모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보상할 것을 촉구하는 국회법안(H. Con. Res 126)을 상정하였다.

1999년    *** 미 국회 Cannon Bldg에서 정신대 사진 및 자료 전시회.
       3월 - 3월부터 5월까지 Philadelphia 의 Free Library에서 본회 소장 사진전시회.
      10월 – 지구촌교회(VA) 김윤심 할머니 기도와 증언의 밤.
      11월 – 빌립보교회(MD)에서 김윤심 할머니 기도와 증언의 밤.

2000년 6월 – Lane Evans 의원과 국회의원들 연대로 위 법안과 같은 내용의 상정안 제출(H. Con. Res 357)
    9월 17일 –워싱턴 디시 소재 유태인 학살 추모기념박물관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주제로 한 심포지움을 개최했으며 김상희 희생자의 증언의 시간도 가졌다.
              본 심포지움은 National Public Radio(NPR)을 통해서 미 전역 중계.
        *** - 본 회에서 발간한 “Comfort Women Speak” 출판기념 및 사인회를 <Chapter Literary Book Store>에서 가짐.
   9월 18일 – 생존 희생자 15명(한국, 중극, 필리핀)이 미 디시지역법원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제기.
   9월 20일 – 미 국회 레이번 하원회관에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들을 위한 ‘2000년 인권상 시상식’을 (한국, 중국, 필리핀, 화란 등의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거행. 본 회가 추최하고 국제인권법률단체, 죠지타운대학, 한국일보사, 한국문제 연구소 등이 후원.

2001년 6월 – 본 회 총회에서 서옥자 총무를 차기 회장으로 선출.
             이사장에 신경림 교수(유임, 후에 바니 오 교수로) 부회장 이문형, 유순미, Christ Simpson 교수(유임).
  7월 23일 – 미 정부 일본군 위안부 소송 기각. 이에 본회와 재미청년연합과 아.태계 여성인권단체가 대규모의 시위.
  7월 26일 – Lane Evans의원 의원회관 케논빌딩에서 기자회견.
             에반스의원은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관련 일본정부의 공식사과와 보상을 촉구하였으며 이를 미하원 20명 의원의 공동으로 법안 상정.
      (본 기자회견장에는 희생자 김순덕 할머니와 동행한 나눔의 집 능광스님이 배석)
     8월 – 워싱턴 디시 법원에서 열린 위안부 소송의 건 심의 현장에 본 회 위원 다수 참관)

2002년 5월 –
평양주관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에 이동우 회장(해외 대표), 함두찬 홍보이사, 신현웅 이사, Barry Fisher 국제 인권변호사 (미 정부와 독일정부 간 2차대전 중 강제노동보상 문제 승소변호사). 참가
12월 – Kennedy 판사의 위안부 소송 기각에 항소 제기.
2003년 6월 – Lane Evans Michael Honda, Captur 의원등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는 법안(H. Res. 226) 상정
2004년 6월 – 미 대법원 위안부 소송 기각, 무효화. 지역순회법원에 본 소송건 송부.
……………………………………….
2007년 7월 30일의 “위안부 상정안(H. R 121) 통과를 위한 범 동포대책위원회”의 경과.

** 1997년 위안부법안이 상정되는 것을 필두로 수 차례 상정과 기각이 번복되는 상황하에서 2007년에도 마이크 혼다의원의 발의로 다시 상정된 것을 마지막 기회라며 혼신의 열정을 쏟기로 하면서 전 동포들의 힘을 하나로 묶는 기구가 절실하므로 해서 3월 16일 H. R. 121 통과를 위한 범 동포대책위원회가 출범 하였는데 대표단체에는 <워싱턴 한인연합회>, <북 버지니아한인회>, <수도권 메릴랜드한인회>, <워싱턴 교역자협의회>, <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워싱턴 대한체육회>였으며 약 30여 단체가 후원단체로 참여 하였다. 이후 뉴욕, 엘 에이, 시카고 등지와 연대를 돈독히 하면서 진행했으며 위원장에 이문형, 홍일송이 공동으로 맡았다.

이후 5개월 동안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매주 목요일을 의회 로비데이로 설정하고 의회를 방문 의원실을 두드리며 인류 역사상 초유의 여성인권유린사례를 묵과하는 의원이 되어서는 부끄럽지 않겠느냐며 법안통과의 협조를 약속 받는 일을 하였다.
60명, 90명, 120명, 드디어 166명의 Co-Sponser 서명이 이루어지자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일본군 위안부법안 상정안의 미 하원 만장일치 통과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곧 이어 미 하원의 위안부 법안 통과를 전례로 삼아 세계 여러나라들이 위안부 법안을 통과시키는 교두보 역할이 되기도 했다.

이후 본 회에서는 최정범, 김광자, 이정실 회장으로 이어졌으니 세 분의 기록에 의존 하기로 하고 이제 별도로 남긴 Campus Tour(대학순방) 위안부문제 세미나 및 사진전시회를 열람키로 한다.

University of Michigan Student를 위시하여
1999년 3월 * Stanford University and U.C. Berkely <Korean American Student Council(KASCON 주최)
         9월 * Whiteman University.
        10월 * cornell University.
        11월 * Vanderbilt University.
2000년   *** American University.
2001년 11월 * 서울에서 황금주 할머니 초청 위안부문제 세미나 및 사진전시회.
             * Cornel Univ. Harvard Univ. Yale Univ. New York Univ. Princeton Univ. Georgetown Univ. 등
2002년 2월 * Gettysburg Univ.에서 세미나.
서울에서 최갑순 할머니 초청 미 중서부 대학 순방 위안부문제 세미나 및 사진전시회.(North Western Univ., University of Wisconsin, Ohio State Univ., The University of Michigan.)
        5월 * Florida Tampa에서의 대규모 위안부문제 심포지움 및 사진전시회.
             APAAF(Asian Pacific American Awareness Foundation ;회장 김도연)가 주최한 이날의 행사에서는 한인의 날 선포도 있었으며 한국에서 오신 이옥선(광주 나눔의 집) 희생자 할머니의 증언도 있었음. 본회에서 서옥자 회장, 이동우 전회장, 취재진 참여)
      11월 * Brown Univ.에서 이옥선 할머니 초청 세미나 개최.
2003년 2월 * Boston지역 대학순방 세미나.(Wellesley College, Tufts Univ., Bosto College, Massachusatts Institute of Technology.)
       3월 * Cornel Univ.에서 위안부문제 세미나.(The korean American Student Council (KASCON 주최)

2015년 2월 21일

자료 총 정리 본회 전임 이사장 이문형